2020. 11. 17. 22:02ㆍ캐리의 일상/캐리의 책이야기
말랑말랑한 책이 읽고 싶었다. 감정선을 건드릴만한 너무 심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책을 찾고 있었다.
면단위 지역이라 꿈나무작은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복지회관 한편에 마련된 작은 서재 신작 코너에 꽂혀 있는 아직 아무도 읽지 않은 이병률 작가의 <혼자가 혼자에게>를 꺼내 들었다.
혼자가 혼자에게
서른 중반에 들어서 이병률 작가의 글을 읽는 느낌은 20대 중반에 접했던 작가의 전작들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나 또한 길에서 보낸 시간들, 세월과 추억이 쌓여 글이 던져주는 물음표에 잠시 고민을 하게 만든다.
한창 지인들에게 책 선물을 하던 시절 가장 많이 선물했던 책 또한 이병률 작가의 <끌림>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였는데. 10대와 20대 라디오에 푹 빠져 살던 내가 즐겨 듣던 이소라의 음악도시와 타블로의 꿈꾸라 또한 작가로도 활동하셨으니 은연중에 그의 글들을 수년간 접했으리라.
이번 주는 특별히 대구로 매일 통학을 하게 되었는데, KTX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며 왕복 3시간의 이동시간 동안 한 번에 다 읽어 내려갔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혼자만의 시간에 대한 고찰, 지나간 인연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들을 아련히 풀어내는 글. 덕분에 따뜻했다.
굳이 수식어를 덧붙이지 않아도 글 목차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어쩔 수 없는 대로.
바람이 통하는 상태에 나를 놓아두라.
20대에는 여행 에세이로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의 여운을 느꼈다면, 지금은 글에 담긴 작가의 생각과 나의 현재를 비교해보게 된다. 세대는 다르지만 그 깊이가 이제는 조금씩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시를 쓰는 작가라 문장 호흡이 짧으면서도 이미지로 그려지는 풍경을 글로 읽을 수 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꽂히는 문장들이 많은데, 혼자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나에게 말을 걸듯이 위안이 되어 준 문장들을 몇 개 뽑아본다.
혼자 있는 시간을 목숨처럼 써야 한다.
그러면서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일어서기도 하는 반복만이 당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오늘 밤도 시간이 나에게 의미심장하게 말을 건다. 오늘 밤도 성장을 하겠냐고.
아니면 그저 그냥 지나가겠냐고.
인생의 파도를 만드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보통의 사람은 남이 만든 파도에 몸을 싣지만,
특별한 사람은 내가 만든 파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을 태운다. -16p
라디오를 켜면서 헤엄쳐 다닐 우주를 열었고,
라디오를 끄면서 내가 만나고 스쳐야 할 아름다움을 기다리느라 우주의 코트 주머니를 한번 더 열어놓았던 찬란한 시절이,
내겐 있었다. -119p
혼자 여행을 해라.
세상의 모든 나침반과 표지판과 시계들이 내 움직임에 따라 바늘을 움직여준다.
세상 흔한 것을 갖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나만 할 수 있고,
나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오직 혼자여야 가능하다. -217p
이 삶을 장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인생길 위에서 누구를 마주칠 것인가 기다리지 말고,
누구를 마주칠 것인지를 정하고 내 인생길 위에 그 주인공을 세워놓아야 한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는 믿음이 우리를 그 사람 앞에까지 '데려다준다'.
그리고 그 믿음의 구름층은 오래 우리를 따라오면서 우리가 지쳐 있을 때 물을 뿌려주고,
우리가 바싹 말라 있을 때 습기를 가득 뿌려준다.
청춘은 이 삶을 압도해야 한다. - 255p
내 삶이 한두 가지 단어로
규정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믿고 따르며 숨쉬는 공기 또한 나에게 한 가지 색깔을 강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바람이 통하는 상태에
나를 놓아두려 한다.
당신도 그러하길 바란다. -274p
5년 전 이맘때 로마 보르게세 공원에 한참을 멍하니 앉아 한 달 남짓 남았던 서른이라는 숫자에 대해 막막해하던 그때도 떠오르고,
2년 전 홀로 떠난 캄보디아 9박 10일 여행에서 드넓은 앙코르와트 숲길을 혼자 걷다가 갑자기 멧돼지를 마주친 아찔한 순간도,
11년 전 무서울 것 없던 스물넷 1년을 보낸 몽골에서의 기억. 특히 훕스 골 초원을 말을 타고 달렸던 순간까지.
코로나 시국.
이젠 언제쯤 다시 가볼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이라 더욱더 애틋하게만 느껴지는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과 풍경 그리고 추억들을 소환하는 책.
혼자여서 더 크게 느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작가의 그 단단함이 느껴졌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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